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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큰아버지 돌아가시고

by Jasonbbak 2012. 9. 22.

큰아버지 돌아가시고


대학교 다닐 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를 읽었다. 20년 가까이 되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는 정치적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루고 경제적 민주화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요구와 새로운 시각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는 옛것들에 대해 젊은이들의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져왔고 권위주의적이고 고집스러워보이는 나이드신 세대들의 가르침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나라를 이끌어가는 세대는 젊은이들이 무시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온 책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 제목만큼이나 굉장한 주목을 끌었었다. 나도 그 책을 읽고 수긍과 많은 지지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공자가 이끌고 제자들이 완성한 유교는 조선의 첫번째 원칙이었고 너무나 완고히 500년 가까이 이어져 왔으나 일제의 폭압적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조선의 정신과 역사에 대해 제대로 평가 하지 않고 유교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아니었나 많은 이들이 비판했다. 그러한 수용이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의 이질적 가치관과 미국문화의 추종적 수입으로 신구세대간의 공존할수 없는 문화를 만들었다.

나에게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계신다. 3대 독자 종손이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큰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서당을 다니셨고 6.25가 일어나 군에 입대하시면서 직업군인이 되셨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겨우버티던 군생활을 막내동생이 배급을 가로채어 오랜동안 자식들이 배를 곪은 것을 휴가나와 아시고 5.16이 일어나기 1년전에 제대하셨다. 그 후 할아버지는 5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지만 유교적 가치관과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할아버지가 요령껏 대한민국 사회를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으셨던거 같다. 할머니가 시장통에 노점을해서 생계를 꾸리시고 할아버지는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이지만 종손이라 4대봉사를 하고 할머니에게 늘 큰소리를 치신다. 명절이면 제를 지내고 조상님들의 묘에 가서 나에게 이 무덤은 누구의 것이고 저 묘는 누구 자식의 묘이며 1년에 한번 지내는 묘사에는 시간이 나면 오라고 하시는 할아버지. 우리 가문의 족보와 몇대째 내려오는 할아버지들의 글들을 나에게 보여주면 이해시키려 하지만 나에겐 그것들을 이해할만한 깊이가 없었다. 매번 들어도 매번 새로운 얘기였고 버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조금 쉽고 다정하게 그런 이랴기들을 해주시는 분이 한 분 더계셨는데 나의 큰아버지였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에게 조근 조근 족보와 조상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주시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병원에서 상을 치르며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먼저 보낸 큰 아들 이야기를 하신다. 못 먹이고 못 가르켜서 너무 슬프다고. 가슴이 아프다고. "내가 일제때 잡혀갈까봐 집안 사람 소개로 시집을 왔는데 그래도 좀 사는 집이라고 듣고 왔데이. 근데 홍아 시집오는 날 꽃가마 타고 내리는데 깜짝 놀랐데이. 초가지붕이 다 쓰러져 가길래 행여꾼들이 잘못 온줄 알았다 아이가. 결혼해서 먹고살기도 힘든때 너거 큰아버지가 광복되던 해에 태어났다 " 나에게 큰아버지는 나의 아버지 보다 나이가 몇살 많은 형이었다. 할머니 얘기를 듣고 처음으로 큰아버지가 광복둥이란걸 알게 되었다.
나라가 해방되던 그 어수선한 때에 태어나 할아버지가 제대하기전까지 잘 먹지 못해서 발이 통통 부은 어린 큰아버지 이야기를 할머니가 고즈넉한 목소리로 얘기하시며 막내할아버지를 원망하신다. 군대에서 월급으로 나온 할아버지 쌀을 그 시절 면사무소에서 가로채어 젊은시절의 호기를 채우셨을 작은 할아버지를 원망하신다. 눈에 큰아들 발이 퉁퉁 부은 발이, 밥을 못 먹어서 부은 발이 아른아른 거리시나부다. 불쌍한 큰아버지.

할아버지가 우신다. 못한다고 큰 소리만 치고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아쉬움과 미안함을 소주로, 눈물로 대신하고 계신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겹치면서 큰아버지와 마지막 통화했던 목소리가 들린다. "홍아 서울에 별일없제? 너거 누나 일땜에. 내가 많이 걱정했는데 니가 아버지 어머니 잘 안심시켜드리고 잘 건사해라 " 겨울이 가고 꽃이 피는 봄이었다.
그후로 나는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게을렀는지 소식한번 전하지 못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아버지가......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있고 아들과 사촌들이 같이 한 집에 있을때 손님이 와서 누가 아들인지 누가 아버지고 큰아버지인지 몰라야 그게 진정한 효이고 제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인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에서 온 편지"에 나오는 글이다. 큰아버지 대하기를 아버지와 똑같이 하라는 말씀이다. 또 정약용 선생님의 아들이 편지에서 아버지가 유배가고 안계셔서 효를 행할수 없다고 하자 선생이 말씀하길 "큰아버지 집에 마일 아침마다 문안드리고 나에게보다 더 극진히 효를 행하면 된다. 내가 없다고 효를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 삼촌들에게도 편지로 늘 인사드려라"라고 당부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정약용선생님은 18년동안 유배지에서 보내 편지 곳곳에 효와제를 말씀하시고 강조하시고 계신다.

이 책이 한달 가까이 맘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눈물이 흘렀고 못 먹는 술을 몇일 동안 먹고 큰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친척들 생각을 했다. 이제 나에게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문중의 이야기를 자세히 얘기해주실 분은 없다. 큰아버지 돌아가시고 못다한 효의 잘못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이나질 않는다. 큰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면서 우리에게 가족의 화목과 나 자신에 대해 깊이있게 돌아볼 수 있는 선물을 주신거 같다.
사랑하는 큰아버지를 보내면서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생각하고 다짐해본다.

큰 아버지 편안히 잠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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